0=1(다람쥐 버전)

존재와 무, 그리고 도토리 한 알의 이야기

나는 오늘도 도토리를 찾아 숲을 누볐다. 너희 인간들이 보기엔 단순한 사냥일지 모르지만, 나에겐 우주의 비밀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. 나무의 뿌리, 바람의 향기, 흙 속에 묻힌 도토리 하나하나는 내가 존재함을 알려주는 증거이자, 동시에 내가 없어도 되는 이유였다.

도토리를 발견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하나다. "이 작은 알맹이가 모든 걸 품고 있구나." 도토리는 나무가 될 수도 있고, 썩어 사라질 수도 있다. 하지만 그 모든 가능성은 이미 이 속에 담겨 있다. 즉, 도토리는 있음과 없음, 둘 모두로 존재한다.

너희는 태초에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하지?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다. 숲 속에는 단 한 번도 '아무것도 없음'이 없었거든. 텅 빈 땅처럼 보이던 곳에도 사실 무수한 가능성이 잠들어 있다. 그 가능성은 씨앗이 되고, 나무가 되고, 나처럼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의 밥이 된다.

너희 인간들은 이걸 뭐라고 부른다지? 0=1이라고? 참 멋지다. 나도 그 이론을 좋아할 것 같아. 아무것도 없던 순간, 이미 모든 것이 존재했기 때문이야. 도토리를 품은 이 땅도, 나무도, 나도 모두 그런 상태에서 태어났지.

오늘 난 도토리를 묻어 두었다. 너희 인간들은 아마 이렇게 묻지.
"그걸 기억할 수나 있을까?"
하지만 기억이란 건 중요하지 않아. 내가 묻어둔 도토리가 싹이 틀지, 아니면 까마귀의 먹이가 될지, 아니면 그냥 흙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. 중요한 건 그것이 이미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야. 내가 다시 찾지 않아도, 그것은 존재했고, 그 자체로 완벽했으니까.

0=1.
숲은 늘 그렇다. 아무것도 없을 때 가장 충만하고, 충만할 때 가장 비어 있다. 너희 인간들이 이해할지 모르겠지만, 이 다람쥐는 오늘도 도토리를 묻으며 깨달음을 얻는다.
나는 나일 필요도 없고, 나일 수밖에 없다.

숲속 어디선가,

다람쥐 올림.